아직까지도 새 집 냄새가 나는 아스널의 홈 경기장, 에미리트 스타디움이 위치한 홀로웨이 지역은 피치 위에서 펼쳐지는 축구 스타일만큼 아름답고 깔끔한 곳은 아니다. 티켓 값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지만 이곳은 티켓 값을 쉽게 지불할 만한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곳과는 거리가 멀다. 다소 허름해 보이는 주택가 한 가운데 위치한 화려한 경기장은 그래서인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이는 아스널이라는 클럽이 프리미어리그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도 비슷하다.
아스널은 전통적인 영국 스타일과 전혀 다른 축구를 구사한다. 다양한 국적의 선수들과 감독들이 가세하면서 프리미어리그는 빠르게 세계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힘과 속도를 기술과 창조성보다 중시하고 있다. 하지만 아스널은 프리미어리그의 승리 방정식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팀이다. 아스널은 아르센 벵거 감독이 부임한 이래 짧은 패스를 중심으로 한 아름다운 축구를 추구해왔다. 지난 몇 년간 아스널은 트로피 없는 암흑기를 보냈지만, 벵거 감독의 축구는 자신의 이상향과 더욱 가까워진 모습이다.
2011년 1월 22일. 아스널과 위건의 2010/2011시즌 프리미어리그 24라운드 경기를 보기 위해 에미리트 경기장을 찾았다. 보통 취재를 위해 경기장을 찾을 때는 늦어도 1시간 전에 입장해서 모든 준비를 마친다. 하지만 이날 서울 못지 않은 런던의 교통 체증 때문에 킥오프 시간인 오후 3시를 채 30분도 남겨두지 않은 시간임에도 입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에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늦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방문하는 유럽의 축구 경기장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설렘, 그리고 잃어버린 듯했던 축구에 대한 열정을 되살려 주고 있었다.
개장한 지 채 몇 년이 되지 않은 에미리트 스타디움은 매우 현대적이었다. 피치와 관중석의 거리가 극도로 가까운 프리미어리그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기 어려운 대형 경기장이었지만, 출전 선수 명단을 호명하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선수들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의 함성은 지금 내가 프리미어리그의 현장에 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1. 오, 아름답고 아름다운 아스널
벵거 감독의 부임 이전에 아스널의 별명이 지루하디 지루한(Boring Boring) 아스널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야 말로 이제 지루하디 지루한 일일 것이다. 이날 현장에서 지켜본 아스널의 플레이는 그야말로 아름답디 아름다웠다. 21세기 들어 축구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FC 바르셀로나의 플레이를 수 차례 지켜봐왔고, 상대팀이 강등권에 있는 위건 애슬레틱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스널의 플레이는 매혹적이었다.
이날 아스널은 4-2-3-1 포메이션으로 선발 라인업을 꾸렸다. 바카리 사냐와 코시엘니, 요한 주루, 가엘 클리시가 포백 라인을 구성했고, 미드필드에는 잭 윌셔와 알렉산드르 송이 중앙 미드필더로 나섰다. 공격진은 로빈 판 페르시를 최전방의 축으로 2선에 시오 월컷, 세스크 파브레가스, 사미르 나스리가 나섰다. 상대팀 위건은 4-4-2 전형으로 나섰는데 그 면면에 크게 주목할 필요는 없었다. 아스널은 전반전에 경기를 완전히 장악했고, 허둥거리던 위건은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아스널 선수들은 모두가 완벽하게 볼을 다뤘고, 적절한 위치로 이동했으며, 지체 없이 패스를 연결하며 전진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짧은 땅볼 패스의 정확도, 그리고 좁은 공간에서 공을 빼낼 수 있는 선수들 개개인의 컨트롤 능력과 침착성이었다. 이는 기술적인 숙련도와 충분한 훈련량, 높은 전술 이해도를 바탕으로 이뤄진 성과다. 벵거 감독이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하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며 단순히 어린 선수들에 집착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2. 경이로운 파브레가스와 놀랍게 성장한 알렉스 송
사실 이날 경기를 보기에 앞서 기대했던 것은 최근 놀라운 활약을 보이고 있는 나스리의 플레이였다. 나스리는 이날도 몇 차례 번뜩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는 이날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아스널의 플레이의 중심 축이 된 것은 역시 팀을 대표하는 얼굴 세스크 파브레가스였다. 판 페르시의 뒷 자리에 배치 되어 매우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한 파브레가스는 현란한 발 재간과 경이로운 볼 컨트롤 기술로 위건의 밀집 수비를 파괴했다.
월컷의 오른쪽 측면 돌파에 이은 절묘한 땅볼 패스의 파괴력, 윌셔의 매끄러운 패스 연결, 나스리의 유연한 기술도 뛰어났지만 파브레가스는 그 보다 한 차원 높은 신세계를 보여줬다. 날카로운 킬 패스와 현란한 드리블 돌파, 완벽한 타이밍의 슈팅 연결 등 파브레가스는 파울 외의 방법으로 막기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위건 수비수들은 볼이 떠난 상황에도 파브레가스를 거칠게 몰아붙이며 신경전을 벌였다. 비록 마무리 슈팅이 위건의 알 하브시 골키퍼와 수비 선수들의 육탄 방어에 막혀 득점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파브레가스는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라는 것을 보여줬다.
파브레가스는 후반전에 위건의 압박 수비가 강해지자 후방으로 내려와 배후를 절묘하게 찌르는 로빙 스루 패스로 탁월한 시야과 패싱력을 자랑했다. 스페인 대표팀의 선배 챠비 에르난데스를 연상케했다. 이는 로빈 판 페르시의 두 차례 득점으로 이어졌다. 판 페르시가 허공으로 날려버린 페널티킥도 파브레가스의 매서운 배후 침투에 이은 결과였다. 파브레가스는 이날 자신이 가진 재능이 무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하지만 아스널의 압도적인 경기의 공이 파브레가스 한 명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더불어 중앙 미드필더로 나서 안정적으로 후방을 지원한 송의 플레이는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투박했던 송은 아스널 공격 줄기의 시발점 역할을 수행했다. 매끄러운 볼 배급과 과감한 전방 가담 능력은 일품이었다. 파트릭 비에라가 팀을 떠난 이후 오래도록 고민이었던 아스널 중원의 장기적인 미래가 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춘 선수였다.
3. 아름답지만 치명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아스널은 분명히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지난 몇 년에 비해 팀은 많이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개선되지 않은 문제점들이 발목을 잡고 있다. 아스널은 현재 프리미어리그 선두 경쟁에서 맨체스터 지역의 두 팀 보다 아름다운 축구를 하고 있지만, 두 팀 보다 치명적인 축구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운 축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바르셀로나의 경우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면, 아스널은 그와 유사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나 치명적인 파괴력과 강인함을 충분히 구축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전반전 종료 시점에 아스널은 최소한 3골을 넣을 수 있는 경기를 했다. 전반전을 1-0 리드로 마친 것도 지탄할 만한 결과는 아니다. 하지만 같은 시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3-0의 스코어로 전반전을 마치고 있었다. 물론 많은 골을 넣는 것은 승점 사냥 이후의 문제지만, 넣어줘야 할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항시 불안요소를 내포하게 한다. 그것은 사기에 영향을 미치고, 역전의 여지를 남긴다.
아스널은 전반전에 아슬아슬하게 마무리 슈팅이 빗나가거나, 슈팅 타이밍을 놓치고 패스를 선택하거나, 골키퍼에게 막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두 경기에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한 두 장면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운이 따르지 않은 것보단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정상이다. 기술 수준이 높은 선수들이 대거 포진한 아스널의 공격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쉬운 기회를 골로 마무리하지 못하는 것일까?
결국은 집중력의 문제다. 우승하는 팀에는 언제나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춘, 풍부한 경험을 갖춘, 모든 선수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권위를 갖춘 주장이 존재한다. 아르센 벵거 감독은 선수들과 팬들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심을 얻고 있지만 그라운드 위에서 팀 정신을 잡아줄 리더의 부재는 아스널의 집중력 약화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쉬운 기회를 놓치거나 하지 않을 실수를 했을 때는 리드하고 있더라도 호통을 쳐줘야 할 주장이 필요하다.
아스널은 비에라가 떠난 이후 주장 선임 작업이 줄곧 신통치 않았다. 티에리 앙리는 위대한 선수지만 위대한 주장감은 아니었고, 윌리암 갈라스는 말할 것도 없다. 파브레가스는 아스널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갖춘 선수지만 아스널과 같은 큰 팀의 정신력을 휘어잡을 수 있는 경륜을 갖춘 선수가 아니다. 선수들의 정신이 느슨해지면 추가골의 기회를 놓치고, 압박의 강도가 약해지면서 상대의 역공을 더 쉽게 허용한다. 그러면서 압도하던 상대에게 뒤통수를 맞게 된다. 익숙한 패턴이다.
아스널은 어린 팀이고, 어린 팀은 사기에 따라 경기력에 기복을 보인다. 질풍처럼 몰아 붙이던 아스널은 수 많은 득점 기회를 날려버린 뒤 페이스를 잃었고, 후반전에 위건이 두 명의 선수를 교체하고 압박 수비를 강화하자 장악력을 상실한 모습을 보였다. 위기 상황에서 파브레가스의 천재성과 판 페르시의 눈부신 마무리로 승리를 낚아챘지만, 운이 좋지 않은 날은 뜻밖의 사고가 날 수 있다. 프리미어리그와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 경쟁을 벌일 빅 클럽과의 경기에선 필시 큰 위험 요소가 될 것이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아스널은 아직 우승컵을 들어올릴 수 있는 팀이 되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축제의 끝, 가능성과 한계
판 페르시는 페널티킥을 실축했지만 그 보다 더 멋진 골로 해트트릭을 완성했다. 아스널 홈 팬들은 경기 내내 승리의 찬가를 불렀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경기장 밖으로 나선다. 한낮에 킥오프했지만 일찍 해가 지는 겨울이라 경기가 끝날 무렵은 이미 어둠이 내렸다. 이제 아스널 팬들에겐 여유롭게 저녁을 먹고 이날의 승리를 되새김질하며 행복한 주말 밤을 보낼 일 만 남았다. 그야말로 축제와 같은 일상이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메가스토어는 아스널 경기를 관람하고 기념품을 사가려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60,355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에미리트 경기장은 약체 위건과의 경기였음에도 59,000명에 이르는 관중이 들어찼다. 서두에 말했듯이 무엇 하나 볼 것 없는 런던 이슬링턴의 홀로웨이 지역이 최소한 한 달에 두 번은 북적거리게 되는 이유는 오로지 아스널 축구 팀 하나 때문이다.
표정이 많지 않은 런던에서 축구는 곧 축제다. 이곳에서 경기는 계속되고 축제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축제에는 확실한 기약이 없다. 머물고 싶지만 머물 수 없다. 세상에 하고 싶은 데로 되는 일은 거의 없는데, 사실은 확실하게 하고 싶은 것을 정하는 것부터가 쉽지가 않다.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목격하고 나선 에미리트 경기장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가? 공은 또 굴러간다. 골문 안으로 넣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